[조선일보] 마술을 부리는 마술에 걸리다

[서울신문]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우리나라 최초 최고령 프로 마술사 이흥선 옹
2016년 5월 10일
‘이흥선 마술대회’, ‘알렉산더 매직 컨벤션’으로 확장 개최
2016년 6월 3일

[조선일보] 마술을 부리는 마술에 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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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 마술사가 서울 용산에 출현했다. “이 항아리 봐라 해, 아무것도 없다 해, 아 그런데 이거 봐라 해, 쌀 나왔다 쌀!” 분명히 텅 비었던 항아리 속에서 쌀이 나오고, 성냥갑이 나오고 콩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구름처럼 몰려든 관중 틈에서 아이 하나가 침을 삼켰다. “마술만 배우면 안 굶겠다, 야.” 아이는 마술사에게 접근했다. “나 마술 가르쳐줘요.” 마술사는 기도 안 찬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이거, 어려워서 아무나 못 배운다 해.” 마술에 의탁해 굶주림을 면하려던 어린 꿈은 물거품이 됐다. 하지만 훗날 아이는 마술 같은 인연으로 진짜 마술사가 되었다. 이흥선(84), 60년째 마술을 공연하고 있는 대한민국 1세대 마술사다. 예명은 ‘알렉산더 리’다.

“그 시절엔 너무 가난했어요. 마술 배우면 없던 쌀을 마구 만드는 줄 알았다니깐. 그만큼 사람들이 순진했던 거죠.” 이흥선이 말했다. 관심 없던 공부. 그래서 중학교에 다니다 말고 돈벌이에 뛰어들었다. 체력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친구들과 한강 백사장에 나가 하루 종일 기계체조를 배웠다. 철봉에서 재주를 넘고, 평균대 위에서 물구나무를 섰다가 뛰어내렸다. 맨땅에 여럿이 인간 탑을 쌓기도 했다. “사람들이 박수를 막 치는 거예요. 그래서 서커스단에 들어갔죠. “이흥선이 지갑에서 빛바랜 사진을 꺼낸다. 웃통을 벗어젖힌 젊은 이흥선은 요즘 말로 ‘몸짱’이다. 이흥선 패거리는 유랑극단 단원이 되어 팔도를 떠돌았다.

“단체 묘기는 한 사람이라도 아프면 못 하거든요. 혼자 할 수 있는 재주가 있어야겠구나, 그래서 차력을 배웠어요.” 차돌을 맨손으로 부수고 병목을 날려버리는 이 몸짱은 다른 서커스단으로 스카우트됐다. 부산에서 흥남, 흥남에서 평양, 강만 건너면 만주 땅인 함경북도 주을까지 돌아다녔다. “어찌나 추운지, 관객들이 포대기를 뒤집어쓰고 눈만 내놓고 구경했다니까. 진짜 웃겼어.” 배삼룡, 심철호, 김정구 같은 예인들도 같이 다녔다.

해방이 됐고 차력사에게는 마술처럼 마술이 돌아왔다. “서울에 있는 한 극장에서 공연을 하는데, 엽청강이라는 젊은 대만 마술사가 다급하게 저를 찾아요. 전날 밤에 여권이랑 지갑을 도둑맞았답니다. 당장 출국을 해야 되는데, 서류가 없어졌다고.” 무작정 그를 집으로 끌고 갔다. 며칠 밤을 재워주고, 서류도 챙겨줬다. 몇 달 뒤 그가 다시 한국에 와서 이흥선에게 이렇게 말했다. “차력은 늙으면 못 한다. 마술은 몸 움직일 힘만 있어도 할 수 있다. 마술사가 되시게.” 그러며 모자에서 비둘기 꺼내는 법과 깡통에서 담배 꺼내는 법을 가르쳐줬다.

그는 “그제서야 빈 항아리에서 쌀이 생기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고 했다. 마술 도구를 직접 만들고, 부수고, 또 만들며 손재주를 익힌 끝에 그는 1949년 자기가 만든 ‘천마 서커스극단’에서 마술사로 첫 공연을 했다. 비둘기가 천막 속을 훨훨 날아다녔고, 관중들은 우레 같은 박수를 쏟았다. 그리고 전쟁이 터졌다.

마술 도구 가득 든 짐 보따리를 들쳐 메고 처가가 있는 전북 고창으로 피란을 갔다. 내려가다 한 경찰서 지서에 신세를 졌다. 지리산 빨치산들이 수시로 출몰하는 곳이다. 고장 난 소총을 보고 이흥선이 말했다. “이거 내가 고쳐볼라요.” 마술사가 소총을 수리한다? 마술로? 이흥선은 도구 만들던 솜씨로 소총들을 분해하고 수리해 재조립했다. 지서장은 그에게 경찰복을 입히고 ‘이 순경’이라고 불렀다.

며칠 뒤 첩보가 입수됐다. 빨치산 1개 부대가 쳐들어온다고. 이 순경은 대나무를 깎아 지서 담벼락에 나란히 세운 뒤 끈을 교묘하게 연결시키고 철모를 씌웠다. 그날 밤, 지서 안에서 끈을 잡아당기자 철모들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순경 여섯밖에 없다던 지서에 저렇게 병력이 많으니, 빨치산들이 올 수가 없었지. 포기한 거죠.” 그러면서 전쟁이 끝났고, 마술사는 서울로 돌아왔다.

폐허 위에 마술은 큰 위안이었다. 이흥선은 극장식당과 유랑극단을 오가며 마술쇼를 펼쳤다. 이흥선이 말한다. “마술사 손은 거칠면 안 돼요. 비단 손수건이 달라붙거든. 근데 도구 만들다 보면 흉터도 생기고 해서 손 관리가 힘들었어요.” 구리무에 구리세린까지 열심히 발랐다.

큰딸 이영숙이 말했다. “아버지 서재랑, 창고에는 없는 게 없었어요. 공구에 마술 도구에, 웬만한 공업사보다 짐이 더 많았으니까요.” 아버지처럼, 그녀 또한 “어릴 때에는 항아리에서 돈 꺼내고 쌀 꺼내는 아버지를 보고 우리 집이 굉장한 부자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 도구로 이흥선은 매일 새로운 마술을 선보였다. 한 극단에서 펼친 공연을 당시 우미관 ‘오야붕’ 김두한이 지켜보다가 우미관으로 그를 스카우트했다. 김두한은 이흥선을 애지중지했다. “무대 바로 아래에서 직원 하나가 큰 소리로 떠들었어요. 조금 있으니 장작 부러지는 소리가 나요.” 김두한이 그 직원을 떡이 되도록 패고 있더라고 했다. “야, 이흥선이 공연하는데, 사람들 조용히 시켜야 할 놈이 떠들어!”

1964년 동양방송(TBC)이 개국 특집으로 방송한 ‘마술쇼’에 이흥선이 출연했다. 이후 이흥선의 주가는 하늘을 찔렀다. 많으면 열 군데까지 극장 공연을 나갔다. 한 달에 한 업소에서 50만원을 공연료로 받았다. 60년대, 70년대에 한 달 수입이 500만원이었다. 그 돈 다 어디 갔나. 딸이 말했다. “마술 공연할 때 제일 많이 쓰는 말이 ‘여기 봐요, 아무것도 없죠, 없죠?’잖아요. 그래서 마술사한테는 돈이 안 붙는답니다. 살다 보니까 그 돈 다 어디 갔나 모르겠어요.” 그러면 사모님 호강은 시켜줬느냐고 물었다. “아, 그럼 호강시켜줬지” 하고 이흥선이 웃는데 딸이 핀잔을 준다. “어머니가 아버지 호강시켜줬죠.” 중매로 만나 결혼한 4년 연하 오금순은 지난해 하늘로 갔다. 언젠가 다시 만나면 유랑하지 않고 꼭꼭 붙어서 제대로 호강을 시킬 참이다.

외국에서 마술사가 오면 으레 알렉산더를 찾았다. 그리고 서로 기법을 교환해 가르치고 배워갔다. 가끔 “먹고살 방법이 없다”고 가난한 자가 찾아오면 마술 몇 가지를 가르쳐줬다. 알렉산더도 다른 한국 마술사에게 불을 쓰는 마술을 물었다. “그 사람이 순서를 거꾸로 알려준 거예요. 그래서 가르쳐준 대로 했다가 얼굴을 확 뎄어.” 외국 마술사야 상관없지만, 같은 한국 땅에서 마술사가 마술사에게 영업 기밀을 알려줄 리가 있겠는가.

1980년. 서울 명동에 있는 퍼시픽호텔 극장식당에서 공연할 때였다. ‘눈물 젖은 두만강’을 부른 김정구가 그에게 말했다. “이름, 촌스럽다. 내가 예명 지어준다. 당신은 마술계의 알렉산더 대왕이다. 오늘부터 이흥선은 알렉산더 리다.” 그날 이후 지금까지 그는 알렉산더 리로 불린다.

백사장 기계체조꾼이 차력사가 되고, 차력사가 마술사가 되어 알렉산더, 대왕(大王)이 되었다. 그 사이에 아내도 무대에 오르고, 큰딸도 무대에 올라 마술 보조를 했다. 1979년, MBC 인기 프로그램인 ‘묘기대행진’에 외손자 김정우와 함께 출연했다. 큰딸네 둘째 아들인 정우는 당시 아홉 살. 공식적으로 최연소 마술사였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TV와 영화가 대중화된 세상으로 변했다. 1980년대, 문득 세상이 마술사를 찾지 않았다. 그런데 1990년대에 마술처럼 마술이 부활했다. 젊은 마술사들이 나타나 대중 스타가 되었다. 청년들이 알렉산더를 찾아와 제자가 되었다. 알렉산더는 알렉산더매직스쿨을 만들어 제자를 길렀다. 그 제자 가운데 외손자 김정우가 있다. 정우는 일본과 옛 소련을 오가며 첨단 마술을 배우더니 아예 알렉산더를 잇는 수제자가 됐다. 정우의 형 준오도 마술 사업 중, 이름하여 ‘알렉산더 매직 패밀리’다.

서울 홍대 앞에 가면 알렉산더 매직 바라는 카페가 있다. 이 패밀리가 운영하는 마술 카페다. 벽에는 왕성하던 시절 찬란한 알렉산더 리 사진들이 즐비한데, 내 눈앞에는 마술로도 되돌릴 수 없는 노인이 앉아있다. “해서 행복했고, 봐서 행복한 마술로 평생을 살았어요. 후회? 절대 없어요. 잘 살았죠.” 가난한 시대, 이 땅 민초(民草)들에게 안식을 선물했던 마술사가 해맑게 웃었다.

[글=박종인 기자]
2008년 5월 3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