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우리교육] 꿈꾸는 이들의 제왕, ‘알렉산더 리’ 이흥선

이흥선 (alexander Lee) (1924~2011) 대한민국 최초의 마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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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우리교육] 꿈꾸는 이들의 제왕, ‘알렉산더 리’ 이흥선

1930년대 말, 앨라배마의 어느 클럽에서 피아노를 치며 노래하고 있던 너대니얼 애덤스 콜(Nathaniel Adams Cole)의 머리에 한 청중이 접어서 만든 종이 왕관이 씌워졌다. 이 조용한 대관식 이후 너대니얼 콜은 냇 ‘킹king’ 콜이 되었다. 눈을 감은지 삼십 년 만에 컴퓨터 그래픽의 힘으로 살아나 딸인 나탈리 콜(Natalie M aria Cole)과 듀엣으로 부른 ‘Unforgettable’로 빌보드 챠트 정상에 올랐던 그다.

이흥선이 어느 클럽에서 마술 공연을 마치고 들어왔을 때였다. 자기 공연순서를 기다리며 모자에서 비둘기가 끝도 없이 날아오르고, 객석으로 던진 낚시줄에서 금붕어가 딸려오는 장관을 지켜보고 있던 ‘두만강’의 가수 김정구가 말을 걸어왔다.
“당신이 마술의 대왕이요, 대왕. 아주 이름을 알렉산더라고 하시오.” 대중음악의 제왕이 손수 집전한 그 대관식에 의해 ‘알렉산더 리’가 태어났다.

한국 최초의 프로마술사이며 근대 마술역사의 개척자인 알렉산더 리, 이흥선을 만났다. 팔순이 며칠 남지 않은 날이었다. 팔순. 그 중에 마술사로 살아온 육십여 년. 그 세월을 화제로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의 의미를 나는 미처 가늠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어느 만큼의 우여곡절과 어느 만큼의 파란만장이겠거니 만하고 있었다. 그의 첫 회상은 나의 가늠을 훨씬 넘어 함경도와 평안도를 떠돌던 유랑극단 시절로 올라가 있었다.

“내가 원래 차력을 했었어요. 뭐 철봉도 하고, 평행봉도 하고 그랬는데, 그게 다 쇠잖아요? 그런데 한겨울에 공연을 하려면 지금처럼 뭐 포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가마떼기를 갖다가 이렇게 쌓아놓고 했다고. 그러면 사람들도 각자 이렇게 가마떼기를 쓰고 들어오는데, 아, 뭐 추 운 거야 말로 할 수 없지. 그런 데서 철봉을 하면 이게 손에 짝짝 붙어버린다고. 아, 참 그 때 생각을 하면 말이지. 나도 나지만, 악사들도 보면 악기에 입이 얼어붙어가지고 그냥 피가 철철 나고 말이지. 그 때 함경도나 이런데 겨울에 공연을 하러 가면 늘 이랬어요.”

그러면서 지갑에 끼워진 사진 한 장을 꺼내 보여주었다. 허리춤에 얹은 두 팔뚝과 몸통 사이가 근육으로 딱 붙어있는 당당한 몸집의 흑백 사진. 한창 차력으로 날리던 서른 무렵이었다.

온갖 ‘청년단’이라는 이름의 인간백정들이 주름잡던 시절, 힘을 주체하지 못하던 젊은이에게는 사람을 때려잡아서 출세하는 방법과 무대에 서 돌을 깨서 먹고 사는 방법이 있던 시절이었다. 박수 받기를 좋아했던 이흥선은 유랑극단으로 나섰다. 굶기를 밥 먹듯 하는 생활이긴 했지만, 세상에 두려울 게 없는 자신감이 있었고 관객들의 박수와 환호가 있었다.
그는 잘 나가는 차력사였다.
그가 마술의 길로 들어선 것은 스물여섯 무렵이었다. 숙소에서 보따리를 도둑을 맞는 바람에 정해진 날짜에 귀국할 길조차 막혀버린 딱한 처지의 대만인 마술사에게 먹을 것을 조금 구해주고 출입국 관리사무소를 쫓아다니며 도움을 준 일이 있었다. 그러자 ‘미스터 X’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던, 본명이 ‘엽청강’이라는 그 마술사는 고작 스물여섯의 이흥선을 ‘아버지’로 모시겠다고 절을 했고, 마술을 전수해줌으로써 은혜를 갚겠다고 했다.

“그 마술사가 그래요. ‘아버지, 아버지가 지금은 젊어서 차력을 하고 그러지만, 그건 곧 늙으면 못하는 거요. 이 마술을 배우면 몸을 움직이지 못할 때 까지 써먹을 수가
있소.’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내다 본 말이었어. 내가 지금 나이를 먹어서 잘 움직이지를 못하는데도 마술을 하고 있잖아요.”
먼 미래까지 걱정하기에는 젊음이 넘치던 그였지만, 가까이서 본 신기한 기술들에 매료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익힌 몇 가지 기술을 무대에서 차력과 함께 선보였고, 그냥 차력만 할 때보다도 훨씬 큰 박수를 받게 된다. 그렇게 그는 마술사가 된다.

“그 시절에도 가끔 마술을 하는 사람들이 있긴 했는데, 수준은 참 유치했죠. 뭐 이쪽에 쥔 동전이 저쪽 손에서 나오고 하는, 뭐 그런 거. 그런데 내 무대에서 이제 비둘기가 날아오르고, 불이 나오고, 사람이 공중에 뜨고 그러니까 사람들이 참 신기해하고 좋아했지.”

전쟁이 났고, 무작정 남쪽으로 피난길에 나선 그는 전라도 무주쯤에서 인민군에게 추월당하게 된다. 그리고 몇 개월을 사이에 두고 그곳에서 국군과 인민군을 모두 겪게 된다. 그러나 해방 전부터 남이고 북이고 종횡무진 공연을 다닌 덕분이었는지, 인민군 간부와 국군 간부가 모두 그를 알아보았다. 덕분에 험한 일은 피해갈 수 있었지만, 꼭 한 번은 남쪽 경찰 대여섯 명과 함께 있다가 북한군 대부대의 공격을 받게 된 적이 있었다. 공격이 시작되면,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그를 살린 것은 마술이었다.

“그 때 무주의 어느 경찰서에 있다가 갑자기 공격을 받게 됐는데, 그 때 경찰은 한 대여섯 명 밖에 안됐거든요. 이거 꼼짝없이 죽게 된 거지. 그런데 거기서 내가 마술을 썼어요.
경찰서에 있는 모자랑 이런 것들을 모아다가 이렇게 세워놓고 어른어른 움직이게 해서 이쪽에 사람이 수십 명 쯤 돼 보이게 한 거지. 그랬더니 인민군들이 겁을 먹었는지 그냥 돌아가더라구.”
마술은 혼돈의 시절, 괴력의 소유자였던 그가 그나마 괴물이 되지 않을 수 있도록 지켜준 힘이었으며 전쟁에서 그를 구해낸 힘이기도 했다. 전쟁이 끝나고 서른 줄에 들어선 그는 이제 본격적으로 마술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마침 극단이나 호텔 공연 무대에서 만났던 연예인들과의 인연으로 그는 방송으로도 순조롭게 진출하게 된다.

“김정구 씨, 또 한복남 씨, 이런 분들이 아주 내 마술을 좋아했어요. 그 때 내 마술이 보통 마술이 아니었거든. 모자에서 비둘기가 그냥 끝도 없이 나오고, 사람 몸이 잘라졌다 붙고. 사람들이 난생 처음 보는 것들이었거든. 그러니까 그 분들이 그 매니저나, 방송 연출자나 이런 사람들한테 그냥 말만 나오면 이흥선이 마술이 아주 대단하다고 맨날 그러니까, 곧장 또 방송 출연 기회가 왔지. 그래서 나 젊어서 한 삼십 여 년은 아주 방송국에서 살았어요.”

그는 우리나라에서 최초이자 거의 유일한 프로마술사로서 독주했다. 통금이 없던 시절에는 하루 밤과 새벽 사이에 열 군데의 밤무대를 누비고 다녔고, 일주일에 한 번씩 고정 출연하는 TV 마술쇼를 몇 개씩, 또 몇 년씩 연장출연을 하곤 했다. 세무서 직원이 도대체 무얼 하는 분이길래 세금을 이렇게 많이 내느냐고 물어올 정도였다. 물론, 버는 돈은 거의 대부분 마술도구를 만드는 데 들어갔다.

“마술사는 말이예요, 밥을 굶는 한이 있어도 마술도구는 만들어야 돼요. 이 마술도구라는 게 조금만 잘못 만들어져도 마술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거라 돈도 많이 들고, 또 정성도 많이 들거든요. 그런데 이걸 소홀히 하면 마술사가 될 수 없는 거지.”
그와의 인터뷰는 이렇게 흘러갔다. 할아버지에게 옛날이야기를 듣던 여섯 살 적으로 돌아가, 나는 내내 감탄사나 흘리고 있었고, 사진을 찍던 최승훈 기자도 자신의 귀에서 튀어나오는 동전이니 주먹 속에서 두 개로 불어나는 공 따위에 넋이 나가 있었다.
처음으로 질문 같은 질문을 던져봤다.

“외손자를 수제자로 삼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육십 년 가까이 마술을 하시면서 키운 수제자가 이제 서른 갓 넘은 외손자라면, 아무래도 제자 복은 별로 없으셨던 건가요?”
그리고 처음으로 좀 씁쓸해진 표정을 읽게 된다.

“아, 내가 마술을 하면서 참 많은 사람을 가르쳤어요. 아마 셀 수도 없을 거예요. 그런데, 이 마술을 배우는 게 쉽지 않아요. 예전에는 지금하고 달라서 사람들이 마술을 그렇게 좋게 보지도 않았고, 또 기술도 쉬운 게 아니고, 그리고 어찌어찌 배웠다고 해도 이건 끊임없이 자기가 만들고 개발하고, 또 연습하고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거든. 그런데 그냥 가르쳐주는 것만 배워서 하려고 하면 얼마 못가고, 좀 약 하지. 실제로 나한테 옛날부터 배운 사람들 중에도 지금 마술을 하는 사람이 있긴 있는데, 좀 약해. 거기다가 내가 또 가르칠 때 그냥 가르치진 않거든. 이게 정신무장이 잘 되야 되고, 먼저 똑바른 가치관을 가져야 되거든요.”
기술을 배우기 전에 똑바로 된 정신을 가져야 한다, 라는 말. 어쩐지 백번 지당하면서도 식상한 말이다. 소림사 무술 영화의 기본 설정이 아니던가. 그러나 사람 죽일 수도 있는 무술이야 그렇다지만 마술에 그게 무슨 필수조건이랴. 그저 문하생 데려다가 급료도 주지 않은 채 한 두 해 청소도 시키고 빨래도 시키고 부려먹으려는 계산은 아닌가, 의심이 갔다.

“마술 하는 데도 정신 상태를 강조하시는 건 왜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말이죠, 이 마술이라는 것이 아주 위험한 거예요. 옛날에 보면, 이 야바위꾼들이나 사기꾼들 중에서 그런 기술만 배우려고 일부러 들어오는 경우들도 있었거든요. 이게 잘못 쓰려고 하면 오히려 차력보다도 위험한 기술들이죠.”

한 십 년 되었을까, ‘심령치료’라는 것이 유행했던 적이 있었다. 필리핀에 가면 심령치료사가 사람 뱃속으로 손가락을 쑥 집어넣어서 암덩어리 따위를 끄집어내는데, 선혈이 낭자하도록 치료를 하는 동안 환자는 아무 통증도 느끼지 못하고 상처도 남지 않는 신비한 기술이라는 것 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어느 유명한 여가수가 심령치료를 받고 주먹 반 만한 암덩어리를 끄집어냈다고 해서 돈 좀 있는 졸부들이 줄이어 비행기를 타던 시절이었다. 어느 방송국 PD가 그 흑막을 파헤쳐보려 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때 그가 찾은 것이 이흥선이었다.

“필리핀에서 가짜 심령치료사들이 설쳐대가지고, 우리나라 사람들도 돈을 싸들고 가서 난리라는 거예요. 그래서 아하, 이건 좀 사람들에게 알려야겠구나 했지요.”

이흥선은 스튜디오에서 직접 똑같은 방식으로 심령치료를 해보였다. 멀쩡한 사람의 배 위에 손가락을 대고 문질러대자마자 시뻘건 피가 뭉게뭉게 솟아나더니 손가락 두 개 만 한 암덩어리가 끄집어내어졌다. 그리고 피를 닦아내자 바늘 하나 찌른 흔적도 없는 말끔한 피부가 드러났다. 그제서야 펼쳐 보인 그의 손바닥에는 빨간 잉크를 머금고 있는 스폰지와 기름기 섞여있어 희끄무레한 것이 꼭 암덩어리 같아 보이는 쇠고기 조각이 들려있었다. 아들이 없었기에, 그 험한데다가 유혹도 많은 마술사의 길은 오십여 년 터울을 넘어 외손자에게 전해지게 된 것 이다.

이렇게 까다롭게 전수되어온 까닭에 마술사들은 선후배간에 하나의 가족을 이룬다. 돈 한 푼 받지 못하며 청소에 잡일을 도맡아 해야 하는 막내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기술을 전수받는 문하생으로, 다시 조그만 무대에 오르고 큰 무대로 진출하며 독자적인 이름을 내는 한 명의 마술사로 탄생할 때까지 그들은 직장동료나 사제의 선을 넘는 밀착된 관심과 개입으로 묶이게 되고, 따라서 자신들을 가족이라고 부른다. 이제 스무 명이 넘어가는 ‘알렉산더 매직패밀리’ 역시 그렇게 이루어졌다. 이런 풍토 탓에 아직 ‘마술협회’ 같은 실질적인 이익집단 하나 만들어내지 못해 어느 방송에서 마술의 비밀을 낱낱이 밝히는 비디오를 방송할 적에도 제대로 항의조차 하지 못했지만, 다른 한 편 이 천대받던 위험한 기술들이 살아남아 당당한 공연예술로 발전할 수 있었다.

마술사라면, 요즘 흔히 제일 먼저 떠올리는 이름이 ‘데이빗 카퍼필드’다. 만리장성을 뚫고, 자유의 여신상을 없앤 그의 무용담은 마술에 관심이 없는 이들이라도 익숙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그에 비해 우리 마술사들의 기술은 소꿉장난 수준이라고 평가절하 한다. 스케일이 너무 작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그런 대형 마술이 오히려 쉬워요. 왜냐하면 그런 대형 마술은 그냥 스텝들하고 각본만 만들어놓으면 실수할 일이 없거든요. 마술사는 그냥 앞에서 이렇게 저렇게 손짓만 하면 마술은 뒤에서 알아서 하는 셈이니까. 하지만 조그만 무대나 이렇게 탁자에서 하는 마술은 관객이 코앞에서 보고 있으니까, 조금만 실수를 해도 실패가 되죠. 오히려 작은 마술이 훨씬 힘들고 연습도 많이 해야 되죠. 그래서 내가 제자들한테 이런 얘기를 하죠. 초등학생들 앞에서 하는 공연이 제일 힘들다. 그 아이들이 좋아하면, 모든 사람이 좋아한다.”

물론, 그런 대형무대 연출이 가능한 미국의 마술시장을 그는 부러워한다. 수천 관객 앞에 서고 싶은 꿈이 어찌 없을 수 있을까. 그러나 지금 으로서는 <알렉산더 매직 바>의 이십여 석 되는 조그만 무대가 우리 마술시장의 면적이다.

상설공연무대야말로 모든 공연 예술가의 꿈이다. 그래서 이흥선이 개척한 마술역사의 한 단락이 이곳 홍대 근처의 <매직바>다. 음료수 한 잔을 마시며 마술공연을 즐길 수 있는 이 조그만 카페는 우리나라 최초의 마술전문 상설공연장이며, 우리 마술의 3세대들이 잔뼈를 키우는 산실이기도 하다. 그리고 롯데월드나 금강산 유람선 같은 대형 무대에서 물러난 이흥선이 아직 지키고 있는 마지막 현역의 무대이다.

그는 세계 최고령의 현역 마술사 중 한 사람이다. 그래서 얼마 전에도 일본 마술협회 행사에 초대되어 입에서 불을 내뿜는 노익장을 과시했고, 팔순 노인이 뿜어내는 열정은 일본 마술사들의 기립박수를 끌어냈다. 공연 화장이 지워지면서 비로소 드러나는 깊은 주름들이 새삼 그 세월의 깊이를 실감하게 하는, 그의 삶은 그대로 놀랍고 장대한 한 편의 마술이다.
사인을 한 장 부탁했다. 그는 사인펜을 쥐고 어눌한 손놀림으로 그림 하나를 그려댔고, 한참 만에 손을 뗀 자리에는 한 개의 선으로 그려진 비둘기 한 마리가 앉아있었다.

그는 비둘기를 기른다. 마술에 쓰이는 순한 태국산 흰 비둘기는 흔히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신통하게도 이십여 년 전 들여온 한 쌍이 저희들끼리 알을 낳고 부화해서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그리고 지난여름 너무 더웠던 날씨 탓인지 알을 낳지 못해 걱정이긴 하지만, 이제는 그 핏줄이 서른 마리 가까이 불어나 ‘알렉산더 매직패밀리’와 동거하는 ‘비둘기 일가’를 이루고 있다. 그러고 보니 비둘기 가족과 알렉산더 마술 가족의 머릿수가 엇비슷하다. 그리고 꿈꾸기와는 일찌감치 담을 쌓는 척박한 땅에서 신통하게 피어나는 모양도 닮았다.
이제 돌아온 기가 막히게 청명한 가을에 뒤늦었지만 비둘기들이 풍성한 다산의 계절을 맞기를. 그리고 한참이나 어렵던 시절 간신히 보내 고 뒤늦게 찾아온 마술의 봄날에 알렉산더 매직패밀리 또한 그 못지않은 번성의 시절을 맞이하기를. 어설픈 글쟁이의 바람이나마 ‘글 마술’이 되어줄는지, 염력을 모아본다. 나에게는 얼마만큼 꿈의 힘이 남아있는지.

글 : 김은식 (2003년 월간 우리교육)